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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음악/하루하루 기록하는 독서

<위건부두로 가는 길> - (7)

by 김바이오공 2020. 4. 24.

11장. 왜 사회주의가 지지 받지 못하는가

 "지금이 몹시 어려운 때라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는 심지어 중산층조차 역사상 처음으로 생활고로 허덕이고 있다"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가 이러한 현실의 출구가 될 수 있으리라 말한다. '제대로 적용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가 생각하는 사회주의는 다음 구절에서 드러난다. '세계는 잠재적으로는 모두를 위한 양식이 풍부한 공간을 향해 항해하는 뗏목 같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누구나 공평한 몫의 일을 하고 공평한 몫의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서로 돕고 힘써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지금 체제에 들러붙으려는 부패한 동기를 갖지 않은 한 누구나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라고. 그렇다. 공평하게 일하고 공평하게 받는 세상. 모두가 풍족한 세상. 바라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사회주의의 모든 예는 파시즘의 색을 입거나 변질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더이상 사회주의라는 '아이디어'를 지지하지 않는다.

 

 왜 사회주의는 인기를 얻지 못할까. 바로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이 영 믿음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별난 사람, 괴짜, 채식주의자.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을 뭐랄까,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또한 중산층 사회주의자들은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겉으로는 계급 없는 사회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사회적 위신에 매달린다. 조지 오웰은 런던에서참석했던 지회를 떠올린다. 그곳의 중산층들은 우월감 가득하고 거만했다. 도무지 노동 계급을 위해 싸운다는 인상을 주지 못했다. 노동 계급은 지금 사회에서 최악의 폐해만 제거되고 나머지 일상은 지금과 똑같은 사회를 미래관으로 갖는다.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혁명이란 그들이 어울리고 싶어하는 서민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똑똑한 '우리'가 하층 계급인 '그들'에게 부여할 일련의 개혁인 것이다. 사회주의는 '지금 알려지고 있는 방식'으로는 주로 미흡하거나 심지어 비인간적일 정도다. 한편으로는 정은 있지만 생각은 없는 사회주의자들, 즉 빈곤을 없애길 바랄 뿐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노동 계급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지금의 문명을 싱크대 밑으로 가라앉혀버릴 필요가 있음을 이해하고 실제로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책으로 훈련받은 지식인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그리고 이 유형은 무엇보다 전적으로 중산층 출신이며, 더구나 중산층 중에서도 도시에서 자란 뿌리 없는 부류 출신이다. 그보다 더 유감스러운 건 이 유형에 앞서 언급했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점이다. '진보'의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온갖 시시한 족속들. 사회주의의 '근본' 취지에 공감하는 평범하고 수수한 사람은 어느 심각한 사회주의 정당에도 자기 같은 부류를 위한 자리는 없다는 인상을 받는다. 더 나쁜 것은 그가 사회주의란 실현될지도 모르지만 가능한 한 저지해야 하는 운명 같은 것이라는 냉소적인 결론을 내리도록 내몰린다는 점이다.

 

(하이드 파크에서 있었던 빈곤 대중들의 행진 모습 - 사회주의가 성장하는 것을 막는 것은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칭하며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비난하는 소위 선봉에 선 자들이다. 책과 이론에 기준을 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억압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 사회주의자임을 오웰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12장. 사회주의는 어떻게 파시즘을 키웠는가

 11장은 지엽적이고 일시적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12장에는 그보다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는 '목표' 때문에 반감을 품고 물러서는 이들이 있다. 사회주의가 통할 것 같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잘' 통할 듯해서 반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뒷걸음질의 이유를 나눠본다면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라는 사상이 다소 불가피하게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 체제라는 관념과 결부되어 있다.

 사회주의는 사적 소유는 모든 개별 단위(가족이든 다른 단위든)가 최소한의 자급을 할 수 있어야만 허용될 수 있다. 원시적인 생활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요구하니, 온 세계가 사회주의화 되려면 세계의 모든 지역들 간에 지속적인 상호 연락과 물자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어느 정도 중안집권화가 된 지배가 필요하며, 모든 인류의 생활수준이 거의 비슷해야 하며 교육도 어느 정도 획일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사회는 어디나 지금(1936)의 미국만큼 고도로 기계화되어야 한다.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가 실현된 세계는 무엇보다 '질서'와 '효율'의 세계일 것이다"고 한다. 그는 기계적 진보의 경향이 삶을 안전하고 편하게 만들어준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기계적 진보로 인해 불필요해지는 자질(엄청난 근육이나 노동력 등)을 보존하려는 것이 부조리하다고 지적한다. 더 고려해볼 문제는 기계가 압도함에 따라 손상되지 않을 인간 활동이 '과연' 있겠느냐는 점이다. 기계는 인간의 일을 덜어주기 위해 존재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서 일을 빼앗기도 한다. 인간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무엇이 일이고, 무엇이 일이 아닌가.

 

 대체 손은 왜 쓰는가? 어깨에 쇠와 고무로 만든 무슨 장치를 달아 쓰면 될 테고, 그러면 팔은 뼈와 가죽만 남은 줄기처럼 시들어버릴 것 아닌가? 그것은 신체의 모든 기관과 모든 기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잠자고, 숨쉬고, 번식하는 것 이상의 활동을 할 이유가 아예 없어진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기계가 대신 해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기계적 진보의 논리적 귀결은 인간을 병 속에 든 뇌 비슷한 무엇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무론 우리가 뜻하는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우리가 향해가고 있는 목표이다. 우리는 기계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진보'는 지속되어야 하고 지식은 절대로 억제되어선 안된다는 관념에 감염되어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경제적인 면에만 눈이 멀어 있어서, 인간에겐 영혼이 없다는 가정에 따라 활동해왔으며, 노골적으로건 암시적으로건 물질적 유토피아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말았다. 때문에 파시즘은 쾌락주의와 '진보'라는 값싼 관념에 반발하는 모든 충동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해 파시즘은 유럽 전통의 옹호자 시늉을 할 수 있었으며, 기독교 신앙과 애국주의와 군사적 가치에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시즘이 히스테리성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싶을 때는 쉽사리 웃어넘길 수 있었다. 스스로를 세상에 반하는 선택된 민족으로 여기는 파시스트 국가들이 서로 치고받다 망할 것처럼 보였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제 파시즘은 국제적인 운동이 되었으며, 그것은 파시스트 국가들이 약탈을 목적으로 단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은 확실히 의식하지 못할지는 몰라도 세계 체제를 모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전체주의 국가라는 비전 대신에 전체주의 세계라는 비전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기계와 기술의 발전은 결국 모종의 집단생산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꼭 평등주의적인 체제가 아닐 수 있다.

 

 경제적으로 집단생산 체제인 세계 사회를 상상하기는 아주 쉬우나 그것은 정치, 군사, 교육에 관한 모든 권력이 소수의 지배 계급과 그 하수인들의 손에 넘어간 사회일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슷한 사회야말로 파시즘이 목표로 삼는 사회인 것이다. 물론 그런 사회는 노예 국가 또는 노예 세계라고 하겠다. 그것은 아마도 외양간 같은 사회일 터이며, 과학적으로 개발한다면 어마어마할 세계의 부를 고려할 때 노예들이 잘 먹고 만족하며 지내는 사회일 것이다. 파시스트들의 목표가 '벌집 국가'라는 말을 흔히들 한다. 그보다는 족제비의 지배를 받는 토끼들의 세상이라고 하는게 더 적확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끔찍한 가능성에 맞서 단결해야 한다.

13장. 우리가 해야 할 일

1부는 우리의 현재 상황을, 2부는 왜 사회주의가 외면당하는지를 설명했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사회주의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 그리고 착취자와 피착취자를 가르는 선이 저확히 어디부터인지를 확실히 밝혀야 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육체노동자뿐인 듯 대하는 잘못된 습성을 버리고 모두를 피착취자로 묶어 단결해야 한다.

 

 두 가지를 대중의 의식 속에 각인해야 한다. 하나는 모든 피착취 인민의 이해관계를 같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사회주의는 상식적인 양식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사람들을 겁주지 말고, 계급 타파 투쟁을 무작정 밀고 나가지 말아야 한다. 계급차가 큰 사람들끼리 진정한 사회주의 정당을 결성하여 함께 싸운다면, 서로에 대한 검정이 달라질 것이다. 그런 뒤라야 계급적 편견이라는 재앙이 서서히 사라질 것이며, 가라앉아가는 우리 중산층은 더 이상 발버둥 칠 것 없이 우리가 속한 노동 계급 속으로 내려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산층이 두려워하던 것 만큼 끔찍한 일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