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주택문제
인구 밀집 지역의 주택문제는 어디를 가든 비슷한 것 같다. 물론 책 속에서 나오는 광부들이 사는 집은 지어질 때부터 뒷문 없이 지어졌다거나, 땅이 기울어져(땅 밑의 석탄을 캐고 있으니) 창문이 안 열리고 문틀을 정비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나랑는 그래도 땅이 기울어지는 일은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모른다. 내가 모르는 지역에는 비슷한 문제가 있을지.
- 등 맞댄 집(back-to-back) :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앞으로 트인 집, 뒤로 트인 집이 따로 있다.
- 뒤가 장님인 집(blind back) : 일반적인 주택 구조에 뒷문이 없다.
집주인이 나쁘고, 벌레가 우글거리고, 바닥이 썩고 벽에 금이 가도 그냥 그 집에 살아야 한다. 주변에 대체할 만한 다른 주거지가 없는데 어쩌겠는가. 집 자체가 구하기 어려우니 무엇이든 그냥 참고 사는 것이다. 주민들 중 일부는 '이런 조건이 아닌 집'을 상상하지 못한다고 한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을 넘어선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물론 정신건강에는 더 좋을 수 있지만, 이렇게 되면 더 나은 삶도 상상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자신이 불행한지도 모르고 살게 된다. '다들 이렇게 산다', '이정도면 괜찮은 축에 속하지' 같은 말들로 합리화해도 그건 주변환경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기차를 타고 30분만 나가도 고급주택가가 있고, 뜨거운 물로 목욕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노동 계급의 주택문제는 왜 해소되지 못하는가.
이런 말도 나온다. '당국에선 현재의 주택들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나마 사용 부적합 판정을 내릴 수는 있지만, 세입자가 이사 갈 집이 없는 이상 철거 명령을 내릴 수 없다. 때문에 사용 부적합 판정을 받은 집들은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게 되며, 그 때문에 더 열악한 집이 되어버린다. 언제 부서버릴지 모를 집을 집주인이 수리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악순환이다. 잠깐 든 생각으로는 당국에서 임시 주거지를 마련하고, 주택의 일정 부분부터 임시 주거지로 옮긴 다음 철거 후 재건축을 하게 만드는 법을 생각했으나, 내가 5초만에 떠올린 방법을 당시 정부에서 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었으리라 싶다. (아래에 공공주택을 건설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역시 정부에서 일하는 머리가 몇 개인데 생각을 못했을리가.)
책에서 '나쁜 집주인'으로 꼽히는 짤막한 사례들 중 한 사례가 머릿속에 박혔다. '키 작은 집주인'들이 평가가 최악이라길래 누구를 지칭하는가 했더니, '평생 모은 돈을 슬럼가 집 세 채에 투자하여 그중 하나에 살고 나머지 두 채의 집세로 살려고 하는 불쌍한 할머니' 같은 유형이란다. 이해가 된다.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못된 집주인은 뭐랄까,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집세를 갈취하면서 매일 세입자를 갈취하는 뚱뚱하고 성질 더러운 집주인'인데 그런 사람은 딱히 슬럼가를 착취하지는 않을 것 같다. 세입자를 갈아내도 얼마 안 나올텐데 굳이 그러겠는가. 그런데 위의 할머니 같은 유형은 어쩔 수 없다. 돈 나올 구석이라고는 세입자 밖에 없고(집이 세 채면 노령연금이 나올까?), 집을 수리해줄 목돈을 없고. 그러다보니 세입자의 말은 하나도 안 들어주고 집세만 뜯어가는 나쁜 집주인이 되는거다. 놀랍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이 변한게 없다.
(조금 다른 말이지만 이 책에 종종 황인종이 등장하는 것 같다. '-노랑이 집주인에게 갈취당하고 중개인에게 공갈당해도-'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 노랑이가 황인종을 뜻하는 것 같다. 앞 장에서도 신문에서 나왔다는 '황화론', 이건 황인종의 세계 진출이 백인의 서양문명을 위협한다는 주장이란다. 각주에 따르면 1895년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처음 쓴 말로 알려져 있다는데, 약 100년 동안 황인종이 잘도 서양문명을 파괴했겠다.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백인들이 아시아 문명을 파괴한게 크다고 보는데. 훔쳐간 문화재만 해도 몇 점인가, 대체.)
'캐러밴caravan' 거주자들도 있는 모양인데, 이들은 집시들보다도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산다고 한다. 우리가 단어만 보고 상상하는 캠핑 같은 삶이 아니라, 작은 마을버스에서 바퀴를 때어낸 것 속에서 7명이 넘는 사람이 사는 삶이다. 끔찍하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손윗형제가 중학교에 들어갔으니 공부환경 조성을 위해 분리를 결정했다) 내 방이 주어졌던 케이스다. 그전까지는 한 방에 형제 둘이서 살았는데, 그때도 싸우는 일이 허다했다. 7명이 거실 만한 곳에서 살게 되면 대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기 싫다.
하여튼 지나가다 저런 캐러밴들을 보면 '저들은 원해서 저런 곳에 산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단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누가 위생적인 환경에서 각자의 방을 갖고 살고 싶지 않겠는가. 집 앞에 딸린 정원이나 예쁜 집은 둘째치고 그냥 인간 존중의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지자체 단체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공공주택을 지을 돈이 없다고 하면서 시 청사 건물을 지을 때는 15만 파운드(아래에 계산을 해봤다)를 써버린다. 당시 영국 물가를 알 수 없으니 정확한 추산이 안되지만, 조지 오웰은 친절하게 덧붙인다. 15만 파운드면 지자체 주택 350체를 짓고, 남은 1만 파운드로 시청을 지을 수도 있었을거란다. 그러니까 단순 계산으로 375체의 주택을 공급할 수 있는 돈을 시청에 매다 꽂았다는 이야기다. 하하, 어떻게 시대가 변해도 이렇게 변화가 없는지. 지금도 이 이야기에 공감할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다.
-1930년대 15만 파운드 -> 2020년 기준 약 9,869,162파운드 -> 149억 5,039만 8,883.66원
(그래, 시청을 짓는 사업에 150억을 꼬라박았다는 소리가 된다. 2010년 기사를 보니 성남시청이 '호화청사'라 불릴 만큼 건설비가 많이 들어 평당 216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도로 평수를 계산해 보니 9900평, 건설비를 대충 추산해보니 214억원이 나왔다. 많이 든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성남시청은 9층짜리 건물에 지하 2층까지도 있는 건물이다. 1930년도 영국에 있던 시청들 중 과연 총 11층짜리 건물이 있었겠는가?)
이렇게 지은 공공주택들은 그래도 욕실이 있고, 벽난로가 있다. 정원도 있긴 한데 안 쓰는 집도 있는 듯하다. 우리가 흔히 학교에 쓰는 그 빨간 벽돌들로 만든 집인데 아무리 최악이라도 슬럼보다는 나아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강제로 인구를 외곽으로 재배치 시키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일터랑 너무 멀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슬럼은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난방비가 조금 적게 들고 사람들이랑도 어울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공공주택으로 이사하는데 성공해도 슬럼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한다. 이 말도 그럴듯하다. 공공주택이라 하면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 같은 느낌일텐데, 어른들이 종종 예전에 마을 단위로 살 때의 공동체의 따뜻함과 너무 멀어졌다는 말을 한다. 현세대는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경우도 있으니 별 생각이 없지만, 당장 함께 사는 가족을 따로따로 분리하는 것과 비슷한 상실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이 책은 분명 1937년에 쓰여진 책인데 현대 사회와 대입할 수 있는 부분들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대체 그동안 발전한 과학 기술은 무엇이며, 증가한 인구수는 무엇이며, 나아졌다는 생활환경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노동계급을 전반적으로 구제할 방법은 없을까. 조지 오웰이 주장하는 '노동계급을 위한 사회주의'는 무엇일지 궁금하다. 아,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보고 굳이 이웃인 북한과 중국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물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단 두 개의 사회주의 국가이긴 하다. 하지만 이들은 일반적인 사회주의에서 변질된지 오래다. 먼저,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경제적인 부분들을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변환한 괴이한 조합을 가진 나라다. 심지어 현 주석인 시진핑이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상황인데 이게 사회주의라니. 전혀 아니다.
10년 전쯤에 중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지인은 노동계급을 볼 일이 많았는데, 그들은 골목 사이사이에 자기들끼리만 어울렸다고 한다. 서로가 너무 좋아서 그런게 아니다. 일반 사람들, 그러니까 중산층 정도 되는 지인의 친구들은 지인이 골목의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자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경고하며 지인을 잡아끌었다. 최하층의 노동계급은 중국판 불가촉천민이라는 소리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중국의 노동 임금이 그리 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비슷할 것 같다. 그들의 인권이 존중되었다면 임금부터 올려줬겠지.
북한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박하리라 생각한다. 북한은 주체사상과 세습으로 이미 이상적인 사회주의에서 많이 멀어졌다. 그냥 독재국가라고 보는게 타당하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국가와 원수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고, 인민들을 착취하는데 공권력이 너무 강하다 보니 아무도 반발하지 못한다. 하지만 김정은이 똑똑하다는 것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김정남이 소위 말하는 '백두산 핏줄'임에도 권력을 세습받지 못한 이유가 뭐겠는가, 혈통의 정당성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김정은에게 있었다는 소리겠지. 독살이든 뭐든 김정은이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고 권력을 쟁취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지금도 미국, 중국, 한국, 그리고 세계기구들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도 핵무기와 생화학무기들의 개발을 진행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에도 저만큼만 머리 좋은 인물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는데(김정은이나 독재가 좋다는 소리는 아니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 낀 엄청난 지리적 우월성 때문에 등 터지는 사이에도 어쩜 정치인들은 자기 밥그릇 챙기기만 바쁜지.
(조금 흐름을 벗어난 소리긴 한데 정치인들의 범죄 전력을 보면 화려하다. 이런 사람들이 대중 앞에 당당히 마이크를 잡고 연설한다고 생각하면 인류애가 떨어지는 기분이다)
공권력 생각이 나니 또 의식이 흘러간다. 미국 경찰의 권한에 대해 들을 때면 놀랍다. 그들은 권총을 늘 지니고, 민간인들은 경찰이 불러세우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경찰의 권위가 있다는 소리다. 우리나라 경찰을 보면 안타까울 지경이다. 미국처럼 사람 머리에 총구를 겨눌 권한을 줘야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래도 권위가 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취지의 말이다. 취객이 진상을 부릴 때 출동한 우리나라 경찰들은 몇 시간씩 소리를 지르고 병을 휘두르며 난리를 피우는 그를 상대해야 한다. 경찰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없다. 우리나라처럼 경찰 이미지가 친근한 나라가 있을까 궁금하다. 포돌이 같은 경찰 마스코트 캐릭터도 있고.
생각이 좀 길어지고 있어서 4장 밖에 읽지 못했다. 확실히 초반보다 재미있어진 것 같다. 공감할거리가 생겨서 그런 것 같은데, 앞으로의 내용들에도 공감이 잘 된다면... 조금 화가 날 것 같다. 대체 1937년에 출판된 책이랑 공감이 되서야 어쩌자는 건지. 아무리 아시아가 유럽보다 산업혁명이나 이런게 늦게 일어났다지만 그만큼 급속한 발전을 했지 않은가. 어쨌든, 다음 장은 실업 수당으로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최근 청년들에게 지급되는 실업 수당이나 최저 임금 같은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조지 오웰이 살았던 사회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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